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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저는 《플립》을 그냥 예쁜 첫사랑 영화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되어 다시 보니, 화면 속 줄리와 브라이스보다 제 학창시절이 더 선명하게 떠올랐습니다. 친구에게 상처를 줬던 기억, 사과를 못 했던 기억 — 그게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에 걸렸습니다.
플립 영화를 본 제가 학창 시절에 몰랐던 것 — 한쪽 이야기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
《플립》이 다른 첫사랑 영화와 다른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같은 사건을 줄리 시점과 브라이스 시점으로 번갈아 보여주는 교차 서술(dual perspective narrative) 방식 때문입니다. 여기서 교차 서술이란 동일한 상황을 두 인물이 각자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나란히 보여주는 구성 방식으로, 관객이 어느 한쪽만 편들기 어렵게 만드는 장치입니다.
저도 처음에는 브라이스가 답답했습니다. 줄리의 달걀을 몰래 버리고, 친구들 눈치를 보며 줄리를 외면하는 모습이 솔직히 꽤 얄밉게 느껴졌거든요. 그런데 브라이스 시점으로 전환되는 순간,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그 아이에게는 그 아이만의 사정이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편견, 또래 집단의 압력, 자신의 감정을 정리하지 못한 미숙함까지.
그때 제 학창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저도 친하게 지내던 친구의 행동을 없는 자리에서 흉봤던 적이 있습니다. 정말 심각한 험담도 아니었고 그냥 웃자고 한 말이었는데, 그 말이 결국 친구에게 들어갔습니다. 다음 날부터 친구가 저를 피하기 시작했고, 저는 처음에 오히려 제가 서운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부끄러운 반응이지만, 그때는 상대방의 입장을 제대로 헤아릴 줄 몰랐습니다.
공감 능력(empathy)이라는 단어를 요즘은 자주 씁니다. 여기서 공감 능력이란 단순히 "불쌍하다"라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처한 상황과 감정을 내 입장이 아닌 상대의 시선에서 이해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출처: 한국학술지인용색인(KCI)에 수록된 아동·청소년 정서 발달 연구들을 보면, 공감 능력은 초등 고학년에서 중학교 시기에 급격히 발달하지만 동시에 또래 관계의 압력에 가장 취약해지는 시기이기도 하다고 합니다. 브라이스가 딱 그 시기에 있었던 거고, 학창 시절의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 교차 서술 방식 덕분에 줄리도, 브라이스도 일방적인 가해자나 피해자가 되지 않습니다
- 한쪽 이야기만 들으면 반드시 놓치는 맥락이 생깁니다
- 공감 능력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통해 천천히 배워가는 것입니다
엄마 시각으로 다시 본 줄리와 브라이스 — 아이들은 관계를 배우는 중입니다
제가 직접 경험해 보니, 아이를 키우기 전과 후에 이 영화가 완전히 다르게 보입니다. 첫 번째로 봤을 때는 줄리의 순수함에 집중했다면, 지금은 브라이스의 부모, 특히 아버지의 말 한마디가 아이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가 눈에 들어옵니다.
브라이스의 아버지는 줄리네 집 뒷마당을 "엉망"이라고 단정 짓습니다. 그 말을 들은 브라이스는 줄리를 더 멀리합니다. 아이는 부모의 언어를 그대로 흡수합니다. 저도 제 아이에게 무심코 뱉은 말 중에 이런 것들이 없었는지 돌아보게 된 장면이었습니다.
반면 줄리의 아버지는 딸이 나무를 잃고 상심에 빠졌을 때 작은 묘목 하나를 선물합니다.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방식이었는데, 제 경험상 아이에게 가장 오래 남는 것은 화려한 설명이 아니라 그 순간의 태도입니다. 줄리가 아버지에게서 배운 것은 결국 "세상을 전체로 바라보라(look at the whole landscape)"는 시각이었고, 그것이 줄리가 브라이스보다 훨씬 단단하게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정서학습(SEL, Social Emotional Learning)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쉽게 말해 학습 능력뿐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고, 타인과 건강하게 관계를 맺는 능력을 키우는 교육 방식입니다. 출처: CASEL(Collaborative for Academic, Social, and Emotional Learning)에 따르면, 아동기의 사회정서학습 경험은 성인이 된 이후의 대인관계 방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줄리는 가정 안에서 자연스럽게 SEL을 경험한 아이였고, 브라이스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 차이가 두 아이의 행동 방식에서 그대로 드러납니다.
우리 아이가 학교에서 친구 문제로 속상해하는 날, 저는 요즘 이렇게 묻습니다. "그때 그 친구는 왜 그런 말을 했을 것 같아?" 처음에는 아이가 "몰라, 그냥 나쁜 거잖아"라고 대답합니다. 그럴 때 저는 조금 더 기다립니다. 바로 판단을 내려주는 것보다, 아이 스스로 상대방의 상황을 한 번이라도 떠올려보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제 경험상 압니다.
관계 회복을 가로막는 것 — 자존심보다 더 어려운 건 타이밍입니다
브라이스가 줄리에게 마음을 열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꽤 깁니다. 할아버지와의 대화, 줄리 집안 사정을 알게 되는 계기, 그리고 경매에서의 실수까지 — 여러 사건이 겹치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행동합니다. 영화에서 이 변화가 조금 빠르게 느껴지는 건 사실이고, 제 생각에도 현실에서는 이 과정이 훨씬 더딥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친구에게 사과를 해야 한다는 건 알았습니다. 하지만 "조금 있다가"가 "내일"이 되고, "내일"이 "다음 주"가 됐습니다. 쑥스러움과 자존심이 이유였지만, 솔직히 가장 큰 이유는 타이밍을 놓쳤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과의 무게가 오히려 더 무거워지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결국 저는 그 친구와 예전처럼 친해지지 못했습니다.
갈등 회피(conflict avoidance)라는 심리 패턴이 있습니다. 여기서 갈등 회피란 불편한 상황을 직면하는 대신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해결되기를 기대하며 미루는 행동 방식을 말합니다. 문제는 대부분의 경우 시간이 관계를 회복시켜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서로의 기억 속에서 그 상처가 굳어질 뿐입니다.
제가 지금 아이에게 가르치고 싶은 것도 이 부분입니다. 사과는 빠를수록 좋고, 용기는 기다린다고 생겨나지 않습니다. 브라이스가 마지막 장면에서 줄리네 집 앞에 나무를 심으러 오는 행동은 말 대신 선택한 행동이었습니다. 완벽한 사과문보다 그 한 걸음이 더 진심처럼 보인 건, 아마 더 이상 미루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제 경험상 이건 아이들한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른인 저도 여전히 연습 중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플립(Flipped) 영화는 아이랑 같이 봐도 괜찮나요?
A. 저는 초등학교 고학년 이상이라면 함께 보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자극적인 장면 없이 또래 관계와 가족 이야기를 잔잔하게 담고 있어서, 오히려 영화를 본 후 아이와 친구 관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됩니다. 제 경우에도 영화 이후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습니다.
Q. 플립 영화에서 줄리가 나무를 그렇게 좋아하는 이유가 뭔가요?
A. 영화 속 줄리에게 플라타너스 나무는 단순한 나무가 아닙니다. 높은 곳에서 세상 전체를 바라보는 경험, 즉 "전체 풍경을 보는 법(look at the whole landscape)"을 처음 배운 장소입니다. 줄리가 아버지에게서 배운 세계관이 그 나무 위에서 처음으로 몸으로 느껴진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무가 베어지는 장면이 단순한 환경 파괴가 아닌 줄리의 내면이 흔들리는 순간으로 보입니다.
Q. 브라이스가 줄리에게 마음이 바뀌는 결정적인 계기가 뭔가요?
A. 영화에서 브라이스의 변화는 한 가지 사건이 아니라 여러 계기가 쌓이면서 일어납니다. 할아버지와의 대화, 줄리 아버지가 지적 장애를 가진 동생을 돌봐온 사실을 알게 되는 것, 그리고 친구 게릿이 줄리를 함부로 평가하는 말에 화가 치밀었던 순간이 대표적입니다. 브라이스가 줄리를 겉모습이 아닌 사람 자체로 보기 시작한 것은 결국 줄리의 집안 사정과 내면을 조금씩 알게 되면서부터입니다.
Q. 플립 영화를 보고 아이와 어떤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A. 제 경우에는 "줄리 입장에서 브라이스가 어떻게 보였을까?", "브라이스는 왜 그렇게 행동했을까?"를 함께 이야기했습니다. 영화가 두 시점을 모두 보여주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해보기"를 연습하는 대화로 이어집니다. 거창한 교훈을 꺼내기보다 그냥 "어떤 장면이 제일 마음에 남았어?"부터 물어보시는 걸 추천합니다.
결론
《플립》을 보고 나서 가장 오래 남은 건 첫사랑의 설렘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닐 수 있다"는 감각이었습니다. 학창 시절의 저는 그걸 몰랐고, 덕분에 사과 한마디를 못 한 채 멀어진 친구가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그 친구에게 말할 수 있다면 "그때 정말 미안했어"라고 하고 싶습니다.
아이를 키우면서 오히려 과거의 제가 더 많이 보입니다. 아이에게 친구를 배려하라고 말하기 전에 저 자신이 먼저 상대방의 입장을 충분히 생각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플립》은 그런 영화입니다. 처음 볼 때와 다른 시기에 다시 보면, 전혀 다른 장면에서 마음이 멈춥니다. 아직 안 보셨다면 한번, 이미 보셨다면 지금의 눈으로 다시 한번 보시기를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