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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저는 《스물》을 처음 볼 때 그냥 웃기고 끝나는 영화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나서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화면 속 세 녀석의 모습이 너무 낯익었거든요. 극한직업으로 1,600만 관객을 동원한 이병헌 감독의 상업 영화 데뷔작이라는 사실을 알고 다시 보니, 웃음 뒤에 얼마나 정교한 계산이 숨어 있는지가 보였습니다.
영화 스물 속 짝사랑, 저도 그 시절엔 아무것도 못 했습니다
영화의 인트로는 세 남자가 한 여자를 좋아하는 방식으로 각자의 캐릭터를 소개합니다. 노트도 못 내밀고, 그림도 못 건네고, 결국 쪽지를 던지듯 투척하는 방식이 제각각이지만, 이병헌 감독은 "그놈이 그놈"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좋아한다는 마음은 같은데 행동은 다 다르다는 거죠.
제가 고등학교 때도 비슷했습니다. 저와 가장 친한 친구가 같은 남자아이를 좋아했는데, 우리는 그 아이를 '찡코'라고 부르며 매일 이야기했습니다. 복도에서 찡코가 지나가기만 해도 서로 눈빛을 주고받고, 그 아이가 우리 중 누구를 더 쳐다봤는지 쉬는 시간마다 분석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우습지만, 그때는 그게 전부였습니다.
제 경험상 짝사랑(片思い, unrequited love)이라는 건 고백하지 못한 것이 실패가 아닙니다. 여기서 짝사랑이란 상대방은 모르는 채로 혼자서만 이어가는 감정을 말하는데, 그 감정 자체가 이미 하나의 완성된 경험입니다. 그때 찡코가 하교 길에 제 친구에게 "너 오늘 우산 없어?" 하고 물어봤던 날, 저는 친구 옆에 서서 심장이 괜히 떨렸습니다. 저한테 한 말도 아닌데요. 그 장면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결국 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졸업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청춘 영화에서 짝사랑은 고백으로 마무리되거나 극적인 이별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제 경험상 대부분의 짝사랑은 그냥 흐지부지 사라집니다. 그게 오히려 더 오래 기억에 남더라고요.
청춘 코미디라서 가볍다? 제 생각은 달랐습니다
이병헌 감독은 《스물》의 시나리오 초고를 영화인의 꿈을 막 꾸기 시작한 20대에 썼다고 합니다. 심오한 의도 없이 20대의 모습을 그냥 담았다고 했는데, 그 솔직함이 오히려 영화를 살렸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20대 전반을 아우르는 방대한 이야기였지만, 미성년자는 벗어났어도 어른이라고 부르기엔 어색한, 딱 스무 살 1년의 이야기로 압축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청춘 영화는 성장통(成長痛, growing pains)을 다룬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여기서 성장통이란 정신적으로 성숙해 가는 과정에서 겪는 혼란과 좌절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이 영화는 성장통을 '보여주려' 하지 않습니다. 그냥 세 녀석이 시끄럽게 살아가는 걸 지켜보다 보면, 어느 순간 가슴이 잠깐 먹먹해집니다.
소소반점이라는 공간이 그 감정을 가장 잘 대변합니다. 철거를 앞둔 낡은 중국집인데, 감독은 이 공간에 "언젠가는 없어질 수밖에 없지만 머물러 있으면 좋겠다"는 정서를 담았습니다. 스무 살 자체가 그렇습니다. 반드시 지나가지만, 지나가는 게 아쉬운 시간. 저도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때가 있었는데, 그 꿈을 붙들고 있던 시간이 딱 그 소소반점 같았습니다. 결국 없어졌지만 없애고 싶지 않았던 무언가.
영화 속 치호, 동우, 경재는 각각 목표 없는 낭만, 꿈과 현실의 충돌, 이성과 감정 사이의 서툼을 대표합니다. 이 세 유형이 한 화면에 공존하는 방식이 코미디적 쾌감(喜劇的 快感)을 만들어냅니다. 쾌감이란 단순히 웃기다는 감각이 아니라, 내가 알던 무언가를 과장된 형태로 보며 느끼는 해방감입니다. 그래서 이 영화가 단순히 가볍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 치호: 목표 없이 자유롭지만, 그 자유에 상처받는 캐릭터
- 동우: 꿈은 있지만 현실 앞에서 흔들리는 캐릭터
- 경재: 이성적이지만 감정 앞에서 가장 무너지는 캐릭터
이병헌 감독 연출법, 알고 보면 더 웃깁니다
이병헌 감독은 독립 영화 《힘내세요, 병원장》으로 먼저 이름을 알렸고, 강영철 감독의 《과속스캔들》과 《써니》 각색에도 참여했습니다. 《스물》은 그 경험이 응축된 첫 상업 영화 데뷔작입니다. 이후 《극한직업》으로 역대 관객 수 2위를 기록하는 감독이 됩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KOBIS).
제가 직접 영상을 보고 놀란 부분은 애드리브(ad-lib)의 비중이었습니다. 여기서 애드리브란 사전에 대본으로 정해지지 않은 즉흥 연기를 말하는데, 이 영화는 핵심 장면들 중 상당수가 현장에서 배우들이 즉흥으로 만들어낸 것입니다. 치호 아버지와의 용돈 협상 장면에서 김우빈의 대사 절반 이상이 애드리브였고, 강하늘이 선배를 따라 어색하게 고개 숙이는 인사도 현장에서 만든 설정이었습니다.
흥미로운 건 크로마키(Chroma Key) 촬영 방식입니다. 크로마키란 초록색 또는 파란색 배경 앞에서 촬영한 후, 후반 작업에서 배경을 다른 영상으로 교체하는 기술입니다. 버스 장면이 대표적인데, 스튜디오가 아닌 야외 이동 버스에 크로마 천을 붙이고 촬영했습니다. 배우들은 이게 맞나 싶었는데 CG 합성 결과물을 보고 놀랐다고 합니다.
소소반점 철거 액션 신은 모션 컨트롤 카메라 같은 고비용 장비 없이 배우들이 가만히 멈춰 있는 채로 카메라가 돌아다니며 찍은 것입니다. 강하늘은 와이어에 매달린 채 3일 내내 가만히 있었다고 합니다. 그 결과물이 에어 서플라이의 〈Lost in Love〉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코믹 혈투 장면입니다. 일반적으로 액션 신에는 큰 제작비가 든다고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상 이 장면은 아이디어가 예산을 이긴 대표적인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세 아이 엄마가 청춘 영화를 보고 얻은 것
지금 저는 세 아이를 키우는 전업주부입니다. 영화 속 치호처럼 자유롭게 돌아다니거나, 동우처럼 꿈을 붙들고 씨름할 여유가 없는 일상입니다. 그런데 《스물》을 보고 나서 이상하게 기운이 났습니다. "아, 저도 저런 시절이 있었구나"가 아니라 "저때의 제가 지금의 저를 만들었구나" 하는 느낌이랄까요.
제 경험상 회고적 감상(回顧的 感想)은 단순히 과거를 그리워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회고적 감상이란 지나간 시간을 현재의 시점에서 다시 해석하는 감정적 반응을 말합니다. 찡코와 관련된 기억도 그렇습니다. 그 아이가 저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잠깐 돌았을 때, 저는 기뻐하기보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며칠을 멍하니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웃기지만, 그때의 저는 그 상황을 감당하기에 너무 서툴렀습니다.
한국영화산업은 2019년 《극한직업》과 《기생충》이라는 두 개의 정점을 동시에 경험했습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KOFIC). 그 두 영화 모두 이병헌이라는 이름과 연결된다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그 시작점이 《스물》이었고, 《스물》의 시작점은 감독 본인의 20대 경험이었습니다. 자기 경험을 소재로 쓴 이야기가 결국 가장 오래 살아남는다는 걸 이 감독이 증명했다고 생각합니다.
동우가 꿈을 접는 장면에서 나오는 대사, "울기엔 좀 애매해"는 최규석 작가의 만화 《울기엔 좀 애매한》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저도 선생님이 되겠다는 꿈이 현실 앞에서 흐릿해졌을 때 딱 그 감정이었습니다. 펑펑 울기엔 뭔가 민망하고, 그냥 넘기기엔 좀 쓴 그 기분. 그 대사 하나가 제 오래된 기억 하나를 정확히 건드렸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영화 스물, 실제로 웃긴가요 아니면 억지 코미디인가요?
A. 일반적으로 청춘 코미디는 억지스럽다는 인식이 있는데, 제가 직접 보니 달랐습니다. 대사의 상당 부분이 현장 애드리브에서 나왔고, 그래서인지 억지로 짜낸 웃음이 아니라 배우들이 실제로 즐기면서 만들어낸 웃음처럼 느껴졌습니다. 특히 치호 아버지와의 용돈 협상 장면은 대본보다 애드리브가 훨씬 많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Q. 스물은 20대가 아니면 공감하기 어려운 영화인가요?
A. 저는 세 아이를 키우는 40대 전업주부인데 오히려 더 진하게 공감했습니다. 20대에 보면 "맞아, 나도 그래"라고 느끼고, 그 시절이 지난 후에 보면 "그때 내가 저랬지"라는 회고적 감상이 더해집니다. 이병헌 감독이 에어 서플라이의 1983년 곡 〈Lost in Love〉를 배경으로 쓴 것도 20대 관객만이 아닌 그 시절을 기억하는 어른들을 함께 겨냥한 선택이었다고 합니다.
Q. 이병헌 감독이 스물 이후에도 비슷한 스타일을 유지하나요?
A. 《극한직업》을 보면 《스물》과 같은 말맛 나는 대사와 병맛 코미디 감각이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다만 스케일이 커지고 장르적 틀이 더 단단해진 차이가 있습니다. 《스물》이 개인의 감정에 더 가까웠다면, 《극한직업》은 장르 코미디의 문법 안에서 그 감각을 극대화한 작품이라고 보는 게 맞습니다.
Q. 스물에서 삭제된 장면이 많다고 하던데, 감독판 같은 건 없나요?
A. 경재와 소민의 관계를 보여주는 서점 장면, 두 사람의 베드신, 빈의 샤워 장면 등 꽤 많은 분량이 편집됐습니다. 감독판 버전이 공식 출시됐다는 정보는 확인하지 못했고, 비하인드 영상에서 감독이 직접 삭제 이유를 설명한 내용으로만 접할 수 있습니다. 삭제된 장면들까지 알고 나면 남아 있는 장면들이 다르게 보이는 재미가 있습니다.
결론
《스물》은 단순히 웃기고 끝나는 영화가 아니었습니다. 이병헌 감독 특유의 애드리브 활용, 크로마키와 현장 즉흥 연출, 그리고 소소반점이라는 공간에 담긴 정서까지 알고 보면 웃음 뒤에 얼마나 정교한 설계가 있는지 느껴집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보다 "그때의 제가 지금의 저를 만들었구나"라는 생각이 더 오래 남았습니다.
고백 한 번 못 한 짝사랑도, 이루지 못한 꿈도, 울기엔 좀 애매했던 순간들도 전부 제 일부입니다. 그 시절을 아쉬워하기보다 지금의 자리에서 다시 설레는 것을 찾아보는 것, 그게 《스물》이 저한테 남긴 숙제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