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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기억을 잃어도 사랑은 남는다"는 말을 그냥 위로용 문구쯤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나서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잠이 들면 하루의 기억이 통째로 사라지는 소녀와, 그 소녀의 일기장을 행복한 추억으로 채워주려는 소년의 이야기인데, 제 머릿속에는 엉뚱하게도 아이들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2남 1녀를 키운 엄마로서 이 영화가 던진 질문이 꽤 오래 마음에 걸렸습니다.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속 선행성 기억상실증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영화가 그것을 다루는 방식
영화 속 주인공 서윤은 선행성 기억상실증(Anterograde Amnesia)을 앓고 있습니다. 여기서 선행성 기억상실증이란 사고나 뇌 손상 이후 새로운 기억을 형성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 어제까지의 기억은 멀쩡한데, 잠이 들고 나면 그날 있었던 일이 전부 지워지는 것입니다. 서윤은 2025년 1월 8일 교통사고를 기점으로 매일 아침 그 시점으로 기억이 리셋됩니다.
실제로 선행성 기억상실증은 해마(hippocampus) 손상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해마란 뇌에서 단기 기억을 장기 기억으로 전환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구조물인데, 이 부위가 손상되면 새로운 정보를 저장하지 못합니다. 출처: 미국 국립신경질환·뇌졸중연구소(NINDS)에 따르면 이 증상은 외상성 뇌손상, 뇌수술, 심각한 감염 등 다양한 원인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영화는 이 의학적 조건을 로맨스의 장치로 활용합니다. 서윤은 매일 일기를 씁니다. 재원이 누구인지,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기록합니다. 그 일기가 다음 날 아침의 자신에게 유일한 연결고리가 됩니다. 제가 이 설정을 보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기록하지 않으면 사라진다"는 것이었습니다. 부모로서 아이들과 함께한 순간을 제대로 기록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새삼 마음에 걸렸습니다.
- 선행성 기억상실증: 새로운 기억 형성이 불가능한 상태. 해마 손상이 주원인
- 역행성 기억상실증과의 차이: 역행성은 사고 이전 기억을 잃는 것, 선행성은 이후 기억을 쌓지 못하는 것
- 영화 속 서윤은 두 증상이 복합적으로 나타남. 사고 이후 기억 형성 불가 + 일부 사고 이전 기억도 결손
청춘 로맨스가 아프게 느껴지는 이유, 재원의 선택
재원과 서윤의 관계는 처음부터 낭만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재원은 친구의 부탁으로 짝꿍을 지키기 위해 서윤에게 고백합니다. 그런데 서윤은 덜컥 "그래"라고 답합니다. 그러면서 조건을 붙입니다. 연락은 짧게 하고, 학교에서는 서로 모른 척하며, 진심으로 좋아해서는 안 된다는 조건이었습니다.
제가 이 장면을 보면서 10대 시절 좋아하는 마음을 숨기느라 일부러 퉁명스럽게 굴었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감정을 들키는 게 두려워서 먼저 규칙을 만들어 버리는 것, 서윤이 정확히 그렇습니다. 기억이 사라지는 자신이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하게 되는 것을 미리 막으려는 방어였던 것입니다.
재원은 그 조건을 받아들이고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서윤이 기억장애를 고백하자 "내일의 너를 같이 속이자"라고 말합니다. 매일 처음 만나는 것처럼 대해 달라는 부탁이 아니라, 함께 오늘을 채워가자는 제안이었습니다. 저는 이 대사가 영화에서 가장 용감한 문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자신이 잊힐 것을 알면서도 오늘의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재원의 선택이 그래서 더 아프게 다가왔습니다.
청춘 로맨스가 흔히 "첫사랑의 두근거림"을 다룬다면, 이 영화는 그 두근거림이 내일 사라진다는 걸 알면서도 오늘 두근거리기로 선택하는 이야기입니다. 그 선택이 아름다우면서도 현실에서 얼마나 버티기 어려운 것인지, 부모가 된 지금의 저는 조금 다른 눈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부모의 사랑도 기억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제가 이 영화를 보고 가장 오래 앉아 있었던 이유는 서윤이 불쌍해서가 아니었습니다. 큰아이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우연히 본 일기 때문이었습니다.
방을 정리하다 그 일기를 보게 됐는데, 거기에는 제가 전혀 몰랐던 아이의 마음이 적혀 있었습니다. 아무도 자신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다는 외로움, 엄마는 항상 다른 형제들 쪽만 본다는 서운함이었습니다. 저는 세 아이를 똑같이 사랑한다고 확신했는데, 아이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엄마는 제가 생각하는 엄마와 달랐습니다.
절차 기억(Procedural Memory)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절차 기억이란 자전거 타는 법이나 악기 연주처럼 반복 훈련을 통해 몸과 감각에 새겨지는 기억을 말합니다. 뇌가 아닌 감각에 뿌리를 내리기 때문에 기억상실증에 걸려도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영화 속에서도 서윤이 미술을 잊지 않은 것은 이 절차 기억 덕분이라고 재원이 설명합니다.
저는 이 대사를 듣고 잠깐 멈췄습니다. 부모가 아이에게 남기는 것도 어쩌면 절차 기억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엄마가 어떤 말을 했는지는 잊어도, 엄마 곁에 있을 때 어떤 느낌이었는지는 몸에 남을 수 있습니다. 사랑받았다는 감각, 혹은 반대로 소외됐다는 감각이 말입니다.
출처: 미국심리학회(APA)의 연구에 따르면 부모와의 초기 애착 경험은 아이의 자존감 형성과 대인관계 방식에 장기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기억이 아닌 감각으로 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이에게 해준 것보다 아이가 제 곁에서 어떤 감각을 쌓았는지가 더 중요했을 수 있습니다. 그 생각이 한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기억이 사라져도 사랑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의 진짜 의미
영화의 마지막에서 재원의 절친 지민은 심장 질환으로 세상을 떠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서윤의 일기에서 자신의 흔적을 지워달라고 부탁합니다. 서윤이 자신 때문에 슬퍼하지 않도록, 내일의 서윤이 더 가볍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재원은 그 기록을 몰래 백업해 둡니다.
이 장면에서 저는 "기억을 지킨다는 것"과 "기억을 지운다는 것"이 모두 사랑에서 나올 수 있다는 걸 생각했습니다. 어느 쪽이 옳은지는 영화도 명확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저는 재원의 선택에 더 마음이 갔습니다. 사랑했던 시간을 없었던 일처럼 만들고 싶지 않다는 감정이 이해됐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 영화가 기억상실이라는 조건을 너무 낭만적으로만 그려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현실에서 선행성 기억상실증 환자와 일상을 함께하는 것은 사랑만으로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반복적으로 같은 사람을 처음 만나는 감각을 견뎌야 하고, 관계의 불균형이 돌봄 제공자에게 상당한 정서적 소진을 가져옵니다. 영화가 그 무게를 충분히 담지는 못했다고 느꼈습니다.
하지만 영화가 전하려는 핵심은 그 어려움의 묘사가 아니라, "오늘을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윤은 마지막에 "나 세 번째 조건을 어긴 것 같아"라고 말합니다. 진짜로 좋아하지 말 것, 그 조건을 어겼다는 고백입니다. 재원은 "나는 어긴 지 오래야"라고 답합니다. 저는 이 두 문장이 영화 전체에서 가장 솔직한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아이들에게 뒤늦게 배운 것도 비슷합니다. 완벽하게 기억되는 엄마가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아이들이 살아가면서 "나는 사랑받았던 사람이었다"는 감각 하나만 남아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감각을 만드는 것은 지금 이 순간, 아이의 이야기를 한 번 더 들어주는 것부터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선행성 기억상실증은 실제로 존재하는 병인가요?
A. 실제로 존재하는 신경학적 상태입니다. 해마 손상이 주된 원인으로, 교통사고나 뇌수술 이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새로운 기억을 형성하지 못하기 때문에 매일 같은 시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느낌을 경험합니다. 영화의 묘사는 의학적 개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나, 실제 증상은 훨씬 복잡하고 개인마다 다릅니다.
Q. 이 영화, 원작이 따로 있나요?
A. 일본 소설이 원작입니다. 이치조 미사키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일본에서 먼저 영화화되었고, 이후 한국에도 소개되었습니다. 원작 소설이 일본 청춘 문학 특유의 감수성을 잘 담고 있어서 먼저 읽고 영화를 보는 것도 좋습니다.
Q. 영화가 슬픈 결말인가요?
A. 마냥 슬프지만은 않습니다. 서윤의 증상이 조금씩 회복되는 신호가 나타나고, 두 사람은 함께했던 시간을 회복해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다만 지민의 이야기는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전체적으로는 아련하지만 따뜻한 여운이 남는 결말입니다.
Q. 청춘 로맨스인데 10대가 아닌 어른도 볼 만한가요?
A. 오히려 어른이 더 많이 울 수 있는 영화입니다. 10대의 설렘보다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기 때문입니다. 부모로서, 또는 누군가를 사랑해본 사람으로서 각자의 방식으로 다가오는 장면이 있을 것입니다.
결론
이 영화를 보고 나서 한동안 아이들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습니다. 딱히 할 말이 없어도 그냥 목소리를 듣고 싶었습니다. 서윤이 매일 일기를 써서 재원을 기억하려 했던 것처럼, 저도 아이들에게 남긴 시간들이 좋은 감각으로 남아 있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대사가 마음에 남습니다. "어떤 기억도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저는 그 말이 위로이기도 하고, 책임감을 일깨우는 말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기억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지금 이 순간 어떤 기억을 만드느냐가 중요합니다. 오늘 아이에게, 혹은 소중한 사람에게 먼저 연락해 보시기를 권합니다. 영화보다 그게 먼저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