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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저는 영화 《친구》를 처음 봤을 때 그냥 부산 건달 이야기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40대가 된 지금 다시 보니, 전혀 다른 영화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준석과 동수, 상택과 중호가 함께 웃던 1976년 부산의 골목이 제 학창시절 골목과 겹쳐 보이더니, 마지막 법정 장면에서는 괜히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이 영화는 폭력의 이야기가 아니라, 각자의 삶으로 흩어져간 친구들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친구들의 선택 같은 골목에서 출발했는데, 왜 이렇게 달라졌을까
영화는 1976년 부산 동네 골목에서 시작합니다. 준석, 동수, 상택, 중호. 네 아이는 같은 동네에서 자라며 성인 잡지를 팔고, 여고생 공연을 훔쳐보고, 롤러장에서 몸을 날리는 평범한 10대였습니다. 그때는 누구도 이 아이들이 이렇게 다른 결말을 맞이할 거라고는 상상 못 했겠죠.
제가 직접 겪어보니, 어린 시절 친구들과의 격차는 처음엔 보이지 않습니다. 같은 학교 교복을 입고, 같은 분식집에서 떡볶이를 먹을 때는 누가 어떤 가정에서 왔는지 잘 느끼지 못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각자의 가정환경(家庭環境), 즉 태어나고 자란 경제적·사회적 배경이 서서히 사람의 선택지 자체를 좁히거나 넓히기 시작하더군요.
준석의 아버지는 부산 조직의 수장이었습니다. 준석이 건달 세계로 흘러들어 간 것은 단순한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어릴 적부터 그 세계가 일상이었다는 현실과 맞닿아 있습니다. 반면 상택은 그 경계 밖에서 대학에 진학했고, 중호는 전학이라는 형식으로나마 다른 궤도에 올라탔습니다. 동수는 장의사 아버지의 세계도, 준석의 세계도 아닌 스스로 선택한 길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사회학에서는 이것을 사회이동성(Social Mobility)이라고 부릅니다. 사회이동성이란 개인이 태어난 계층이나 환경에서 벗어나 다른 사회적 위치로 이동하는 정도를 뜻합니다. 이 영화는 낮은 사회이동성 속에서 각자의 선택이 어떻게 엇갈리는지를 정직하게 보여줍니다. 출처: 한국연구재단 학술지(KCI)에 실린 다수의 연구에서도 가정환경이 개인의 진로 선택에 미치는 영향이 상당히 크다는 점이 반복적으로 확인됩니다.
그래서 저는 준석을 단순히 나쁜 사람이라고 보기 어려웠습니다. 환경이 그의 선택을 설명해 줄 수는 있지만, 그 선택의 결과까지 면죄해주지는 않습니다. 이 경계가 이 영화에서 가장 불편하고 가장 솔직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 준석: 조직 보스 아버지 밑에서 자라 건달 세계로 편입
- 동수: 장의사 아버지의 현실을 거부하고 스스로 조직을 선택
- 상택: 대학 진학 후 평범한 삶의 궤도를 유지
- 중호: 학교 전학을 계기로 다른 방향으로 이탈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묶어두던 것들
영화에서 가장 오래 마음에 남은 장면은 화려한 싸움 장면이 아니었습니다. 준석이 크리스마스 카드를 사러 가는 길에 상택에게 "내가 살다가 죽이고 싶은 놈이 생기면 나한테 말해라, 내가 쳐줄게"라고 말하던 장면이었습니다. 그 말투 뒤에 숨어 있는 쓸쓸함이, 제가 경험한 어떤 우정의 뒷면과 비슷했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어릴 때 우리가 "친구를 위해 뭐든 해준다"라고 말할 때, 그건 진심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는 불안감의 표현이기도 했습니다. 준석이 동수에게 "하와이로 가라"라고 마지막 부탁을 하는 장면도 비슷하게 읽혔습니다. 그것은 명령이 아니라 애원에 가까웠습니다.
영화에서 주목해야 할 심리적 개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의리(義理)라는 정서입니다. 의리란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 즉 관계를 유지하는 데 따르는 암묵적 규범을 뜻합니다. 한국 남성 문화, 특히 조직 문화에서 의리는 종종 개인의 판단보다 우선시 됩니다. 그런데 영화는 이 의리가 아름답기도 하지만 얼마나 쉽게 무기가 될 수 있는지도 보여줍니다.
준석은 동수를 죽이라는 지시를 내렸고, 법정에서 그것을 자백했습니다. 저는 그 자백이 동수에 대한 마지막 의리였을 거라고 봤습니다. 거짓으로 빠져나가는 것보다 모든 것을 인정하고 가는 것이, 준석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의 속죄였을 수도 있겠다고요.
그러나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영화를 보며 '이 우정이 결국 상대를 살리는 힘이 아니라 서로를 파멸시키는 힘이 되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제가 아름답다고 믿었던 우정의 어떤 부분이 흔들렸습니다. 진짜 친구라면 같이 끝까지 가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방향일 때 멈추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 영화 속 친구들은 그 말을 끝내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그 시절 우정은 진짜였을까
영화가 끝나고 한참을 앉아 있었습니다. 상택이 면회를 마치고 떠나는 장면, 준석이 하얀 복도로 사라지는 마지막 컷. 그게 자꾸 머릿속에서 재생됐습니다.
제가 직접 겪어보니, 친구와 멀어지는 데는 꼭 극적인 사건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결혼하고, 이사하고, 직장이 바뀌고, 아이가 생기면서 어느 순간 연락이 끊깁니다. 하루에 몇 번씩 카카오톡을 보내던 친구가 1년에 한 번 생일 축하 메시지 정도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어 있을 때, 처음엔 서운했습니다. '내가 뭘 잘못했나?' 싶기도 했고요.
그런데 지금은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정의 소멸이 아니라 삶의 단계 변화(Life Stage Transition), 즉 개인이 성인이 되면서 거치는 사회적 역할과 관계망의 구조적 변화에 가깝다고 봅니다. 발달심리학에서는 성인기로 넘어가며 관계의 수가 줄어들고 깊이가 선택적으로 집중되는 현상을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설명합니다. 출처: 미국심리학회(APA)의 성인 발달 연구에서도 이 현상은 반복적으로 관찰됩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연락이 닿지 않는 옛 친구들을 떠올릴 때, 그 관계가 실패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시절 우리가 서로에게 가장 소중했다는 사실이 시간이 지났다고 해서 거짓이 되지는 않으니까요.
영화 《친구》의 상택이 면회를 마치고 준석에게 "건강해라"라고 말할 때, 그것은 40년 가까운 시간이 압축된 두 글자였습니다. 더 많은 말을 할 수 있었지만, 그 두 글자만으로도 충분했던 것은 그 사이에 쌓인 진짜 시간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경우엔 그 장면에서 생각보다 훨씬 오래 울컥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영화 친구 결말에서 준석은 왜 자백을 했을까요?
A. 준석은 법정에서 동수 살해를 지시했다는 사실을 스스로 자백합니다. 주변 사람들이 그를 살리려 했지만 준석은 거짓으로 빠져나가기를 거부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동수에게 건넬 수 있는 마지막 방식의 인정이자, 어쩌면 준석이 평생 지켜온 '직접적인 방식'의 마지막 표현이었다고 봤습니다.
Q. 영화 친구에서 동수는 왜 하와이행을 거절했나요?
A. 동수는 준석의 마지막 부탁인 하와이행을 처음엔 거절했습니다. 하지만 준석이 떠난 후 마음을 바꿔 공항으로 향했고, 이미 그때는 준석의 조직원들이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너무 늦은 결심이었던 셈인데, 이 장면이 영화에서 가장 비극적인 이유는 동수가 끝내 스스로 선택했지만 그 선택이 닿지 못했다는 데 있습니다.
Q. 영화 친구는 실화 기반인가요?
A. 곽경택 감독이 자신의 실제 부산 학창시절 경험을 바탕으로 각색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정 실존 인물을 그대로 묘사한 것은 아니지만, 시대적 배경과 정서는 감독 본인의 기억을 상당히 반영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영화 속 디테일들이 그 시대를 살아온 분들에게 특히 생생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Q. 영화 친구에서 상택 역할이 왜 중요한가요?
A. 상택은 조직의 세계에 깊이 발을 들이지 않은 유일한 인물입니다. 그 덕분에 영화 말미에서 준석의 면회를 가고, 나머지 세 친구의 이야기를 바라보는 시선을 관객에게 제공합니다. 저는 상택을 보면서 "나는 이 이야기에서 어느 위치에 있는 사람인가"를 자꾸 생각하게 됐습니다. 상택은 살아남은 자의 시선을 대변하는 인물입니다.
결론
영화 《친구》를 다시 보고 나서 한동안 옛 친구들 생각이 났습니다.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 1년에 한 번도 연락이 안 되는 사람들. 그렇다고 그 시절 우정이 가짜였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때 우리가 함께했다는 것 자체가 진짜였으니까요.
이 영화는 폭력과 조직의 이야기를 빌려서 결국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에게 친구란 무엇이었는가?" 저는 이 질문에 아직도 완전한 답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다만 지금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친구란 평생 곁에 있어주는 사람이 아니라, 내 인생의 어느 한 계절을 함께 살아준 사람이라고. 한 번쯤 영화를 다시 꺼내 보시길 권합니다. 나이에 따라 전혀 다른 영화가 보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