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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처음 틀었을 때 다큐멘터리인 줄 알았습니다. 화면이 너무 담담해서, 이게 연출된 장면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영화 <여행자>는 1970년대 서울의 한 보육원을 배경으로, 아홉 살 소녀 진니가 아빠에게 버려진 뒤 이별을 받아들여 가는 과정을 조용하게 따라갑니다. 사랑을 알기도 전에 이별이 먼저 찾아온 아이의 이야기입니다.
아홉 살이 감당해야 했던 현실 — 보육원과 해외입양의 시대
영화를 보고 나서 한 가지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 시대 아이들은 도대체 어떻게 버텼을까?" 하고 말입니다.
영화의 배경인 1975년은 대한민국 해외입양(international adoption)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해로 기록됩니다. 여기서 해외입양이란, 국내에서 양육이 어렵다고 판단된 아동을 외국의 양부모에게 법적으로 보내는 제도를 의미합니다. 당시 단 한 해에만 근 20만 명에 달하는 아이들이 해외로 보내졌다고 하는데, 이 숫자를 마주했을 때 저도 한참 멍하니 있었습니다.
보육원(아동양육시설)이란 부모의 부재나 경제적 사정으로 가정에서 양육받기 어려운 아동을 일시적 혹은 장기적으로 보호하는 시설을 말합니다. 영화 속 보육원 아이들의 최종 목표는 "따뜻한 가정으로 입양 보내지는 것"이었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아이들은 자기소개를 외우고 영어를 배우고 웃음을 연습했습니다. 아이들이 스스로를 팔아야 하는 구조, 그게 당시의 현실이었습니다.
특히 영화에서 눈에 밟힌 장면은 예신 언니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녀를 입양하려는 가정의 목적이 너무나 노골적으로 노동력 착취에 가까웠고, 예신 언니 본인도 그걸 꿰뚫어 보고 있었습니다. "식모질하기 싫다"는 그 한마디가 오히려 가장 어른스러운 발언처럼 들렸습니다. 아동 권리(children's rights) — 즉 아이가 착취나 학대 없이 안전하게 성장할 권리 — 가 제도적으로 보장받지 못하던 시대의 민낯이었습니다.
멀쩡한 부모를 만나 태어나는 것도 이렇게 큰 운임을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 생각이 드는 순간, 제가 가진 평범한 일상이 갑자기 무게감 있게 느껴졌습니다.
- 1975년은 한국 해외입양아 수가 역대 최고를 기록한 해로, 당시 누적 해외입양 아동 수는 근 20만 명에 달합니다 (출처: 보건복지부).
- 보육원 아이들은 입양이 성사되면 송별 파티를 받았고, 남은 아이들에게 그 자리는 부러움과 슬픔이 뒤섞인 시간이었습니다.
- 당시 해외입양 제도는 아동의 의사를 반영하기보다 어른들의 판단과 경제 논리에 따라 운영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 영화는 그 구조 안에서 아이들이 어떻게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남았는지를 담담하게 보여 줍니다.
이별의 방식을 배운다는 것 — 진희의 이별 서사가 남긴 것
이 영화에서 제가 가장 오래 붙잡혔던 장면은 진니가 아빠에게 받은 구두와 옷을 그대로 입고 땅을 파는 장면이었습니다. 저는 그 장면을 보면서 한참 화면을 멈춰 두었습니다. 말이 필요 없었습니다.
아빠는 여행을 간다고 했습니다. 케이크도 사 줬고, 새 옷도 맞춰 입혔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이별을 위한 포장이었다는 걸, 아홉 살 진희는 철문 너머로 아빠의 뒷모습이 사라지고 나서야 알게 됩니다. 아동 애착 이론(attachment theory) — 여기서 애착 이론이란 아이가 주 양육자와 형성하는 정서적 유대가 이후 심리 발달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는 발달심리학 개념입니다 — 의 관점에서 보면, 진희가 겪은 갑작스러운 분리는 아이에게 상당한 심리적 외상(trauma)을 남길 수 있는 사건입니다.
진희의 저항 방식도 인상 깊었습니다. 보육원 문 앞에서 밤새 버티고, 밥을 거부하고, 담장 위에 올라가 버팁니다. 어른의 눈에는 고집스럽게 보일 수 있지만, 사실 그건 자신이 버려졌다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자기 보호 기제(self-protection mechanism)였을 겁니다. 쉽게 말해 그 저항이 사라지는 순간, 아이는 그 현실을 인정한 것이라는 뜻이기도 하죠.
숙희와의 관계도 영화의 핵심입니다. 숙희는 진희에게 머리 감는 법을 알려주고, 새의 죽음 앞에서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어른이 해 줬어야 할 일들을 또래 아이가 대신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숙희마저 미국으로 입양을 떠납니다. 진희는 아빠와의 이별도, 숙희와의 이별도, 모두 자신이 원하지 않은 방식으로 받아야 했습니다.
그 모든 장면을 보면서 저는 한 가지 생각이 계속 들었습니다. "도와주는 어른이 단 한 명이라도 곁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현실에서 그 아이들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영화를 보고 나서도 한동안 그 감각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영화가 고른 방식 — 담담함이라는 언어
이 영화는 결코 눈물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과장된 음악도, 극적인 대사도 없습니다. 그냥 그 시대의 어느 보육원에서 어떤 아이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여 줄 뿐입니다. 그 담담함이 오히려 더 깊이 찌릅니다. 저 처음에는 다큐멘터리인 줄 알고 봤는데, 그 착각이 생길 만큼 이 영화의 결은 사실에 가깝습니다.
아동 문학에서 말하는 성장 서사(bildungsroman) — 여기서 성장 서사란 주인공이 경험과 고난을 통해 내면적으로 성숙해 가는 이야기 구조를 의미합니다 — 의 틀에서 보면, 진희의 여정은 다른 성장물과 달리 어떤 '승리'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냥 받아들이는 것, 그게 이 아이가 할 수 있는 전부였습니다. 그 결말이 더 슬픈 이유입니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도 이 시기 아동복지 관련 영화들을 아카이빙하고 있으니, 관심 있는 분들은 참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영상자료원).
자주 묻는 질문
Q. 영화 여행자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인가요?
A. 특정 개인의 실화를 직접 원작으로 한 영화는 아닙니다만, 1970년대 한국 보육원과 해외입양 제도의 현실을 매우 사실적으로 재현했습니다. 저도 처음에 다큐멘터리로 착각했을 만큼 현장감이 강합니다. 그 시대를 살아간 수많은 아이들의 이야기가 녹아 있다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Q. 1970년대 한국에서 해외입양이 그렇게 많았던 이유가 뭔가요?
A. 당시 한국은 전쟁 이후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였고, 국가 차원의 아동복지 시스템이 지금처럼 갖춰져 있지 않았습니다. 가정 내 양육이 어렵다고 판단되면 시설로 보내지는 경우가 많았고, 시설에서 다시 해외로 입양 보내지는 구조였습니다. 1975년에만 그 수가 최고치를 기록했다는 사실은, 당시 사회가 아이들을 어떤 눈으로 바라봤는지를 보여 주는 지표이기도 합니다. 지금이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죠.
Q. 아이를 키우는 부모 입장에서 이 영화를 보면 어떤 감정이 드나요?
A. 아이를 키우는 분들이라면 더 강하게 가슴에 꽂히는 영화라는 반응이 많습니다. 진희가 아빠의 뒷모습을 보며 뛰어나가는 장면은, 내 아이 얼굴이 겹쳐 보인다고 하시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저도 그 장면에서 화면을 멈추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세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더더욱 그렇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Q. 어린 새론양이 나오는 영화라는데, 연기가 어느 정도인가요?
A. 어렸을 때의 새론양의 연기는 과하지 않고 정말 그 나이의 아이처럼 자연스럽습니다. 그 자연스러움이 오히려 더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연기라는 걸 잊게 만드는 아이의 표정과 눈빛이 영화 전체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결론
영화 여행자는 큰 소리로 울게 만드는 영화가 아닙니다. 대신 조용히, 오래 남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한동안 멀쩡한 부모 아래에서 태어난 것 자체가 얼마나 큰 행운인지를 새삼 실감했습니다. 그 감각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아이를 키울 형편이 안 된다면, 적어도 설명이라도 해 줘야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진희가 받은 상처의 절반은 이별 자체보다, 아무 말 없이 사라진 아빠에게서 온 것이었으니까요.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어린 시절만큼은 충분히 사랑받으며 자랄 수 있기를, 이 영화를 보고 나면 그 바람이 더 절실해집니다.
한 번쯤 혼자, 혹은 아이와 함께 앉아서 보시길 권합니다. 울어도 됩니다. 그 눈물이 이상한 게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