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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 안에서 조용히 눈물을 훔치다 보면, 어느새 옆 사람도 같이 울고 있는 걸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2014년 개봉작 <남자가 사랑할 때>가 딱 그런 영화였습니다. 처음엔 가볍게 앉았다가, 마지막 장면에서 극장 전체가 조용히 무너졌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사랑받아 본 사람이라면, 혹은 사랑을 망쳐본 사람이라면 이 영화 앞에서 무너지지 않기가 어렵습니다.
줄거리 — 거친 남자의 서툰 사랑
한태일은 군산 시장 골목을 무대로 일수를 관리하는 남자입니다. 형 집에 얹혀살며 가족 속을 썩이고, 말보다 주먹이 앞서는 인물이죠. 그런 그가 채무자의 딸 호정을 만나면서 영화는 전혀 다른 결을 갖기 시작합니다.
태일은 호정에게 접근하기 위해 그녀의 채권을 모두 자신이 사들이고, 하루 한 시간씩 만나주면 각서를 무효화해 주겠다는 기상천외한 제안을 내놓습니다. 무지개 칸을 하나씩 색칠해 채우면 각서를 돌려준다는, 어른이 생각해 낸 것치고는 너무 순수해서 오히려 웃음이 나오는 방식이었습니다. 저도 처음 그 장면을 봤을 때 '이게 로맨스가 되겠어?' 싶었는데, 결국 그게 영화에서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장면이 됐습니다.
호정은 처음엔 그를 밀어냅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협박으로 각서를 쓰게 한 남자가 갑자기 좋은 사람인 척 다가오는 상황이니까요. 그런데 태일이 자기 아버지를 챙기고, 겉보기와 전혀 다른 순수한 면을 보여줄수록 호정의 마음도, 그리고 관객의 마음도 조금씩 열리게 됩니다.
감동 — 알면서도 울게 되는 이유
이 영화를 두고 "결말이 뻔하다"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불치병, 이별, 화해 — 익숙한 멜로드라마의 공식을 그대로 따릅니다. 그런데 저는 이 영화가 뻔한 공식을 쓰면서도 관객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하는 이유가 따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카타르시스'(catharsis) 효과 때문입니다. 카타르시스란 감정의 정화(淨化)를 의미하는데, 쉽게 말해 억눌렸던 감정이 영화를 통해 한꺼번에 쏟아지며 마음이 개운해지는 현상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비극의 본질로 제시한 개념이기도 하죠. 저도 영화관을 나오면서 '이상하게 마음이 가볍다'라고 느꼈는데, 그게 바로 이 카타르시스였던 것 같습니다. 실컷 울고 나서야 가슴속 무언가가 빠져나간 느낌이랄까요.
특히 태일이 뇌종양 진단을 받고도 호정에게 말하지 못한 채 돈을 남기려 큰 도박판에 뛰어드는 장면, 그리고 모든 걸 잃고 구치소에서 2년을 보내는 장면은 감정 이입(emotional identification)의 밀도가 상당히 높습니다. 감정 이입이란 관객이 등장인물의 감정을 자신의 것처럼 느끼는 심리적 동일시 현상을 말합니다. 남자들이 이 영화에서 특히 많이 우는 건, 태일의 방식이 서툴고 엉망이지만 진심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채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 뇌종양 진단 후 호정에게 말하지 못하고 돈만 남기려 했던 장면
- 치매 기운이 오는 아버지에게 "나 효도한 거다, 절대 까먹으면 안 돼"라고 말하는 장면
- 죽음 앞에서도 호정이 소개팅하는 걸 보며 슬프게 웃고 자리를 떠나는 장면
- 엔딩 OST '기억이란 사랑보다'가 흘러나오며 막을 내리는 마지막 장면
황정민 — 이 배우가 아니었다면
솔직히 말하면, 저는 이 영화를 처음엔 반신반의하며 봤습니다. '황정민이 로맨스를?' 하는 의심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보면 볼수록 오히려 황정민이기 때문에 이 영화가 가능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황정민은 이 작품에서 메서드 연기(method acting)에 가까운 몰입을 보여줍니다. 메서드 연기란 배우가 역할의 내면 심리와 동기를 철저히 내면화해 실제처럼 표현하는 연기 방식입니다. 거칠고 무섭게 채무자를 몰아세우다가도, 호정 앞에서는 어쩔 줄 몰라 손을 어디 둬야 할지 모르는 그 어색함이 연기라는 게 믿기지 않았습니다.
"나 좋아해요. 약속이나 꼭 지켜요." 이 짧은 고백 장면은 제가 영화관에서 처음으로 눈물이 차오른 순간이었습니다. 세련된 고백이 아니라, 겨우 이 말 하나 꺼내는 데 온 힘을 다한 것 같은 연기였거든요. 한국 영화사 연구자들도 이 작품을 황정민의 연기 스펙트럼을 넓힌 대표작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한국영화 데이터베이스).
한혜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래 아픈 아버지를 간호하며 지쳐버린 여자의 눈빛, 그리고 태일의 아버지가 치매 증세를 보이는 걸 옆에서 보는 장면에서 버스에서 혼자 보다가 눈물을 참지 못했다는 후기가 많은 건 당연한 일입니다. 저도 그 장면에서 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이 영화가 남긴 것 — 영원하지 않기에 소중한
사랑하는 두 남자를 차례로 떠나보내야 하는 호정을 보면서, 제가 먼저 떠올린 건 그녀의 슬픔이 아니었습니다. 그걸 지켜봐야 하는 태일의 마음이었습니다. 자신이 곁에 있어줘야 할 사람인데, 정작 자기가 그녀를 가장 힘들게 할 존재가 된다는 걸 알면서도 옆에 있으려는 그 마음이요.
어떤 분들은 이 영화가 "신파(melodrama)적 과잉"이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신파란 감정을 의도적으로 자극해 눈물을 유도하는 극적 장치를 과도하게 사용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저도 그 시각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불치병, 이별, 화해가 순서대로 배치된 구조는 신파의 문법을 충실히 따릅니다.
그런데 이런 영화에 "뻔하다"는 이유로 마음을 닫는 게 꼭 현명한 태도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저는 오히려 뻔한 이야기인데도 울컥한다는 게, 그 감정이 그만큼 보편적이라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제 경험상 이런 영화를 통해 실컷 울고 나면, 정말로 마음의 상처가 조금 옅어지는 느낌이 옵니다. 그게 과학적으로도 근거가 없는 말은 아닙니다. 감정 표현이 심리적 회복력(psychological resilience)을 높인다는 연구 결과는 이미 여러 차례 발표된 바 있습니다(출처: 미국심리학회 APA).
이별 없는 세상은 없습니다. 가족이든 친구든 사랑하는 사람이든, 언젠가는 헤어집니다. 그래서 이 영화가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불편함이야말로 이 영화가 제대로 기능하고 있다는 신호라고 생각합니다.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이 더 소중하다는 걸, 이 영화는 거칠고 구질구질한 방식으로 아주 정확하게 전달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남자가 사랑할 때, 결말이 어떻게 되나요?
A. 태일은 뇌종양으로 인해 결국 세상을 떠납니다. 구치소에서 나온 뒤 호정과 화해하고 마지막 시간을 함께 보내지만, 호정의 아버지가 그랬듯 그녀의 간호를 받으며 생을 마감합니다. 슬프지만 두 사람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상태로 끝나기 때문에 완전한 비극이라고만 보기도 어렵습니다. 보는 분마다 느끼는 결이 다를 수 있습니다.
Q. 남자들이 특히 이 영화에서 많이 운다는데, 왜 그런가요?
A. 태일이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 서툴고 엉망이지만 진심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도 그 시각에 동의합니다.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하면서 행동으로만 사랑을 증명하려는 모습이, 많은 남성 관객들에게 본능적으로 감정 이입이 되는 것 같습니다. 여성 관객들도 충분히 많이 울지만, 태일의 시선으로 보느냐 호정의 시선으로 보느냐에 따라 울컥하는 장면이 달라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Q. 영화 OST '기억이란 사랑보다'는 누가 부른 건가요?
A. 가수 이문세가 부른 곡으로, 엔딩 장면과 함께 흘러나와 영화의 감동을 배가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이 곡이 나오는 순간 극장 전체가 조용히 무너지는 분위기가 됐다는 후기가 많습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도 이 곡만 들으면 장면들이 다시 떠오른다는 분들도 있는데, 저도 그 경험을 했습니다.
Q. 신파 영화 별로 안 좋아하는데, 이 영화도 그런 편인가요?
A. 솔직히 신파적 요소가 없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불치병, 이별, 화해가 순서대로 나오는 구조는 전형적인 멜로드라마 공식을 따릅니다. 다만 신파 영화가 불편하다는 분들도 이 영화만큼은 황정민의 연기 때문에 몰입하게 됐다는 후기가 적지 않습니다. 한 번 보고 판단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결론
힘들 때 마음껏 울 수 있는 영화가 필요하다면, 저는 주저 없이 이 영화를 권하겠습니다. 예쁘게 포장된 사랑이 아니라, 구질구질하고 서툴고 엉망이지만 그렇다고 결코 거짓되지 않은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제가 영화관에서 봤을 때 처음엔 그냥 가볍게 앉았다가, 마지막엔 제어가 안 될 정도로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극장을 나오면서 이상하게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습니다.
세상에 영원한 건 없습니다. 지금 옆에 있는 사람에게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신다면, 이 영화가 그 마음을 더 또렷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울고 싶은 밤에, 혼자 조용히 틀어놓기 좋은 영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