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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끝나고 불을 켜는 순간, 제가 처음 한 행동은 옛 친구에게 문자를 보내려다 멈춘 것이었습니다. 《대도시의 사랑법》은 그런 영화입니다. 퀴어 소재를 다루지만 결국 '있는 그대로의 나를 봐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40대 부모가 된 지금, 이 영화는 사랑과 우정을 넘어 자녀를 대하는 방식까지 되돌아보게 했습니다.
대도시의 사랑법의 원작과 영화, 무엇이 달라졌나
솔직히 영화를 보기 전, 원작 소설을 먼저 읽었던 게 오히려 부담이었습니다. 박상영 작가의 소설집 《대도시의 사랑법》은 여러 단편을 묶은 작품으로, 영화는 그중 단편 「재희」를 바탕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원작 단편에서는 흥수의 시점이 서사의 중심축입니다. 그가 재희라는 존재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그 시선 안에서 이야기가 흘러갑니다.
반면 영화는 이 구도를 바꿉니다. 재희와 흥수, 두 사람이 각자의 무게를 가진 인물로 동등하게 서사를 이끌어 갑니다. 이것이 원작과 영화 사이의 가장 큰 서사 구조(narrative structure) 차이입니다. 여기서 서사 구조란 이야기 안에서 누구의 시점으로, 어떤 순서와 비중으로 사건이 전달되는가를 뜻합니다. 소설은 내면 독백으로 흥수의 감정을 세밀하게 파고들 수 있지만, 영화는 배우의 표정·공간·대사로 인물의 심리를 보여줘야 하는 매체적 한계와 가능성이 동시에 존재합니다.
제가 영화를 보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지점은 바로 이 부분이었습니다. 김고은이 연기한 재희는 소설에서 흥수가 바라보는 '재희'보다 훨씬 입체적으로 살아 움직입니다. 거침없이 회식 자리에서 혐오 발언에 맞서고, 자기 삶의 선택에 책임을 지려는 모습이 원작에서 글로 읽을 때와는 다른 무게로 다가왔습니다.
원작이 문학적 밀도로 승부한다면, 영화는 시각적 생동감으로 그 빈자리를 채웁니다. 두 가지가 어느 쪽이 낫다고 비교하기보다, 각자 다른 방식으로 '재희와 흥수'라는 관계를 완성한다고 느꼈습니다.
- 원작 단편 「재희」: 흥수의 시점 중심, 내면 심리 묘사에 집중
- 영화: 재희·흥수 두 인물이 동등한 비중으로 서사를 이끎
- 공통점: 자신을 있는 그대로 봐주는 한 사람의 존재가 삶에 미치는 영향
퀴어 서사가 말하는 것, 그 무게와 한계
제 경험상 퀴어 서사(queer narrative)를 다룬 한국 영화는 이 작품 이전까지 두 가지 방향으로 나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퀴어 서사란 성 소수자의 정체성·관계·사회적 경험을 중심에 놓고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하나는 무겁고 비극적인 방향, 다른 하나는 가볍고 소비적인 방향. 《대도시의 사랑법》은 그 사이 어딘가에 자리를 잡으려 합니다.
흥수가 성 정체성을 숨기며 겪는 고통은 분명 실재합니다. 어머니가 새벽마다 방에 들어와 기도할 때 아무 말 못 했다는 장면, 수호에게 "커밍아웃하면 나는 뭐가 되냐"며 밀어내는 장면은 제가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닌데도 위장(camouflage), 즉 자신의 본모습을 감추고 주변에 맞추는 심리적 긴장감이 얼마나 소모적인지를 느끼게 해 줬습니다.
다만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영화가 중간중간 유쾌한 템포로 흘러가면서, 흥수가 감내하는 고통의 밀도가 희석되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성 소수자 당사자들이 겪는 커밍아웃(coming-out) 과정, 즉 자신의 정체성을 타인에게 공개하는 행위는 단순히 한 번의 고백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직장·가족·사회관계망 전반에서 반복적으로 이루어지고, 그 과정에서 겪는 차별과 배제는 영화가 보여주는 것보다 훨씬 구조적입니다(출처: The Fenway Institute, LGBTQIA+ Health Education).
그럼에도 이 영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흥수의 이야기를 비극으로만 소비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수호를 놓쳐버린 후 흥수가 "항상 거기 있을 줄 알았어"라고 말하는 장면은 성 정체성의 문제를 넘어 모든 관계에서 우리가 저지르는 실수와 닿아 있습니다. 제20대에도 비슷한 실수를 한 기억이 납니다. 오래 곁에 있던 사람을 당연하게 여기다 어느 날 그 자리가 비어있음을 깨달았을 때의 그 감각.
관계의 본질, 40대가 되어서야 보인 것
영화를 보고 나서 며칠 동안 머릿속에 남은 대사가 있습니다. 재희가 흥수에게 건네는 말입니다. "네가 너인 게 어떻게 네 약점이 될 수 있어." 20대에 이 말을 들었다면 그냥 지나쳤을 것 같습니다. 40대인 지금은 이 한 문장이 부모로서 자녀를 대하는 방식과 겹쳐 보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무조건적 긍정적 존중(unconditional positive regard)이라고 부릅니다. 인본주의 심리학자 칼 로저스(Carl Rogers)가 제안한 개념으로, 상대방을 조건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상담과 치료의 영역에서 비롯된 개념이지만, 제가 보기에 재희와 흥수의 관계는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입니다(출처: 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 인간중심치료).
제 경우엔 이랬습니다. 부모가 되고 나서 자녀가 '제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자라길 바라는 마음이 얼마나 강한지 처음으로 실감했습니다. 그 마음이 사랑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간섭이 될 수 있다는 모순을 느낍니다. 흥수 어머니가 새벽마다 방에서 기도하는 장면이 유독 마음에 걸렸던 건 그래서였을 겁니다. 그 어머니 역시 분명 아들을 사랑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관계의 본질이란 결국 상대를 내 방식으로 완성시키려는 욕망을 내려놓는 것에 가깝다고,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20대의 저는 친한 친구라면 늘 함께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 믿음이 깨질 때마다 누군가의 잘못을 찾으려 했고요. 지금은 압니다. 각자의 삶이 달라지면서 멀어지는 관계가 있고, 그것이 꼭 실패가 아니라는 것을.
자주 묻는 질문
Q. 원작 소설을 안 읽어도 영화를 이해할 수 있나요?
A.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영화는 원작 단편 「재희」의 구조를 가져오면서도 두 인물의 관계를 처음 보는 관객도 따라갈 수 있도록 재구성했습니다. 다만 원작을 먼저 읽으면 흥수의 내면을 더 깊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Q. 퀴어 소재가 불편할 수 있는데, 가족과 함께 봐도 될까요?
A. 영화는 퀴어 소재를 다루지만 선정적이거나 자극적인 방식보다는 두 사람의 우정과 성장에 초점을 맞춥니다. 오히려 가족 간에 '서로 다름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를 이야기하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영화를 함께 보고 나눈 대화가 평소보다 훨씬 솔직하게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Q.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은 어디서 볼 수 있나요?
A. 국내 주요 OTT 플랫폼에서 시청 가능합니다. 극장 개봉 이후 넷플릭스, 왓챠 등에 순차적으로 공개된 바 있으니, 현재 서비스 여부는 각 플랫폼에서 직접 확인하시는 것이 정확합니다.
Q. 박상영 작가의 원작 소설집은 어떤 내용인가요?
A. 《대도시의 사랑법》은 여러 단편을 엮은 소설집으로, 각 단편이 독립적인 이야기를 갖고 있습니다. 영화의 바탕이 된 「재희」 외에도 도시 안에서 사랑하고 상처받는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제가 직접 읽어봤는데, 문장이 리드미컬하고 인물의 감정 표현이 날카로워 단편 하나하나가 짧지만 밀도가 높습니다.
결론
《대도시의 사랑법》은 퀴어 서사를 통해 보편적인 질문을 던지는 영화입니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상대를 내 방식대로 완성하려 하지 않는 것, 그 사람이 자기답게 살아가도록 옆에서 버텨주는 것이 진짜 관계일 수 있다는 생각을 영화를 보고 나서 오래 붙들고 있었습니다.
현실의 복잡한 문제를 영화가 모두 담기엔 러닝타임이 짧다는 아쉬움은 있습니다. 하지만 그 한계를 알고도 이 영화를 권하고 싶은 건, 영화가 끝난 뒤 자신의 관계를 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나친 청춘의 한 페이지를 들춰보고 싶을 때, 혹은 내 곁의 사람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진 않은지 점검이 필요할 때 보면 좋을 영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