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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학교폭력 영화라고 생각하고 앉았다가, 어느 순간 제 학창 시절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아서 당황했습니다. 영화 《내 이름은》은 4월 15일 개봉하는 정지영 감독의 신작으로,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현지 관객의 눈물을 자아낸 데 이어 제28회 우디네 극동 영화제 메인 경쟁 부문에 초청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습니다. 이름을 바꾸고 싶은 소년 영옥, 그리고 기억을 잃어버린 채 살아온 정순. 두 사람의 이야기는 처음엔 따로 흘러가다가 결국 하나의 질문 앞에서 만납니다. 그 이름 뒤에는 어떤 시간이 있었는가.
내 이름은 속 이름 하나에 담긴 정체성의 무게
저도 처음엔 단순히 이름 콤플렉스 이야기겠거니 했습니다. 그런데 영화 속 영옥이 자기 이름을 '이민종'으로 바꾸고 싶어 하는 장면을 보면서, 제 중학교 시절이 갑자기 떠올랐습니다.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던 저는 유독 다른 사람의 시선이 크게 느껴졌고, 있는 그대로의 저보다 남들 눈에 어떻게 보일지를 먼저 생각했습니다. 영옥이 이름을 바꾸고 싶어 하는 마음은, 결국 지금의 나를 버리고 다른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었을 겁니다.
여기서 '정체성 혼란(Identity Confusion)'이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이 제시한 이 개념은 청소년기에 자아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명확히 정의하지 못해 내면이 흔들리는 상태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스스로 답을 내리지 못할 때 생기는 심리적 불안입니다. 영옥이 이름 하나에 그토록 집착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영옥은 전학생 경태의 권력에 끌립니다. 저는 이 부분을 보면서, 영옥이 단순히 나쁜 친구를 만난 게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경태를 통해 인정과 소속감, 그리고 자신감을 얻으려 했던 겁니다. 20대 때의 저도 비슷했습니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앞서서 선택의 결과보다 선택하는 자유 자체가 더 중요하게 느껴졌던 시절이 있었으니까요. 영옥이 경태의 패거리와 어울리며 '이민종'이라는 새 이름을 얻는 장면은, 그래서 단순한 비행이 아니라 소속과 인정을 향한 절박한 몸짓으로 읽혔습니다.
그렇지만 이름을 바꾼다고 해서 열등감이나 상처까지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그 점에서 영화가 던지는 첫 번째 질문은 꽤 날카롭습니다. 이름이 바뀐다고 내가 바뀌는가.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이름보다 먼저 바뀌어야 하는 건, 그 이름을 바라보는 자기 자신의 시선입니다.
- 영옥의 개명 욕구는 단순한 이름 콤플렉스가 아니라 정체성 혼란의 외적 표현
- 경태에게 끌리는 이유는 권력이 아니라 인정·소속감·자신감에 대한 결핍
- 이름(外)을 바꾸기 전에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內)이 먼저 바뀌어야 한다는 것
봉인된 트라우마, 선글라스 뒤의 얼굴
정순 이야기는 처음엔 좀 느리게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최면 장면에서 "손목이 아파, 무당 아주머니가 날 끌고 가서 나가"라는 대사가 나오는 순간, 갑자기 등이 서늘해졌습니다. 제가 직접 겪어본 건 아니지만, 30대가 되면서 부모님의 삶을 이해하기 시작했을 때 느꼈던 그 낯선 감각과 비슷했습니다. 내가 몰랐던 상처가 그분들 안에 있었다는 것.
정순은 '해리 장애(Dissociative Disorder)'를 앓고 있는 인물로 묘사됩니다. 해리 장애란 극도의 심리적 충격을 감당하지 못할 때 뇌가 스스로 그 기억을 차단해 버리는 현상을 말합니다. 햇빛이 찬란한 날이면 발작을 일으키고, 아홉 살 이전의 기억이 아예 없는 정순의 증상은 이 해리 장애의 전형적인 양상입니다. 출처: American Psychiatric Association에 따르면, 해리 장애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와 밀접하게 연관되며, 어린 시절 극심한 트라우마를 경험한 경우 성인이 된 뒤에도 일상 기능에 영향을 미칩니다.
제가 이 장면에서 특히 마음에 걸렸던 건, 정순 곁에 있던 딸 소영과 영옥입니다. 그들은 정순이 왜 그러는지 모릅니다. 그냥 봄만 되면 이상해지는 엄마, 선글라스를 끼지 않으면 무너지는 엄마로 알고 있었을 뿐입니다. 저도 아이 셋을 키우면서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의 모든 걸 안다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자녀도 부모의 모든 걸 안다고 착각합니다. 가장 가까운 사이이기 때문에 오히려 가장 묻지 못하는 것들이 쌓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이의 행동만 보고 "왜 그랬니?"라고 판단하기 전에, "무슨 마음 때문에 그랬을까?"라고 한 번 더 생각하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정순이 선글라스를 마침내 벗어내는 장면은, 그 연습이 얼마나 어렵고 오래 걸리는 일인지를 말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제주 4·3을 기억한다는 것의 책임
제주 4·3은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봉기와 이후 1954년까지 이어진 토벌 과정에서 수만 명의 민간인이 희생된 역사적 사건입니다. 영화 속 역사 수업 장면에서 선생이 "4·3 사건 설명은 안 하셨는데"라는 민수의 질문에 "별로 중요하지 않은 거니까 넘어가"라고 대답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제가 직접 겪어보니, 이런 침묵이 결국 얼마나 오래 상처를 봉인하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출처: 제주 4·3 평화재단에 따르면, 4·3 사건의 희생자는 약 14,000명에서 30,000명으로 추정되며, 진상 규명은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여기서 제가 영화에 조금 날카로운 시선을 갖게 된 부분이 있습니다. 정순의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가는 과정이 미스터리처럼 소비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제주 4·3이라는 역사는 한 인물의 충격적인 과거를 밝혀내기 위한 반전 장치가 아닙니다. 실제 사람들의 삶과 희생이 담긴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역사 트라우마(Historical Trauma)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특정 집단이 집단적으로 겪은 극심한 폭력이나 억압이 세대를 넘어 후손에게까지 심리적·사회적 상처로 전이되는 현상입니다. 쉽게 말해, 직접 겪지 않은 세대도 그 상처를 무의식 속에 안고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소영이 외할아버지의 제삿날을 혼자 바닷가에서 기리는 장면은 바로 이 역사 트라우마의 세대 전이를 보여주는 장면이었습니다.
제가 아쉽다고 느낀 것은 이겁니다. 영화가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밝히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기억을 안고 살아남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는가'까지 더 깊이 보여주었더라면 메시지가 훨씬 강력했을 겁니다. 과거를 기억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기억이 다시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지 않으려면, 지금의 우리가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까지 물어야 합니다. 감동을 주는 것과 구조적 책임을 묻는 것은 다른 일이기 때문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영화 《내 이름은》은 제주4·3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영화인가요?
A. 직접적으로 사건을 재현하기보다는, 4·3의 기억을 안고 살아온 한 인물의 내면을 통해 간접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입니다. 제가 영상 자료를 살펴보면서 느낀 건, 역사를 정면으로 다루기보다 그 역사가 한 가족의 일상 속에 어떻게 남아 있는지를 보여주는 데 집중한 영화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역사 다큐멘터리보다는 가족 드라마에 가깝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Q. 베를린 영화제에서 어떤 반응이 있었나요?
A. 베를린 국제 영화제 상영 당시 현지 관객들의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냈으며, 이후 제28회 우디네 극동 영화제 메인 경쟁 부문에도 초청되었습니다. 국내 관객보다 해외 관객이 먼저 뜨겁게 반응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역사적 맥락을 잘 모르는 외국 관객도 인물의 감정선에 깊이 몰입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Q. 염혜란 배우가 정순 역을 맡았나요?
A. 네, 배우 염혜란이 정순 역을 맡았습니다. 《폭삭 속았수다》를 통해 제주어의 결을 깊이 있게 보여준 배우로, 이번 작품에서도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는 인물의 위태로운 내면을 소화했습니다. 신예 신우빈는 영옥 역으로, 소년의 심리 변화를 섬세하게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Q. 이 영화가 학교폭력을 다루는 방식이 다른 영화들과 다른가요?
A. 제가 느낀 가장 큰 차이는, 이 영화가 가해자와 피해자를 단순히 나누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영옥이 경태 패거리에 끌리는 과정을 보면, 그 안에 인정받고 싶은 마음과 소속감의 결핍이 있습니다. 학교폭력을 '나쁜 아이의 문제'로 보는 게 아니라,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그 아이의 마음부터 들여다보는 시선이 느껴졌습니다.
결론
《내 이름은》을 보고 나서 오래 남은 생각은 하나입니다. 이름이나 행동만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고, 그 사람이 살아온 시간을 바라보라는 것. 10대의 저는 나 자신이 왜 힘든지만 생각했고, 20대에는 내가 원하는 대로 사는 게 전부인 줄 알았습니다. 30대가 되어서야 부모님의 삶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고, 지금은 아이들의 행동 뒤에 어떤 마음이 숨어 있는지를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영화가 완성된 답을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저는 이 작품을 '질문을 던지는 영화'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다만 바람이 있다면, 기억의 진실을 밝혀내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그 기억 이후의 책임과 치유까지 더 깊이 파고들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월 극장가에서 이 영화를 직접 확인해보고 싶다는 마음은 분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