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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와 말없이 가방을 내려놓던 날이 있었습니다. 반 친구 한 명이 장난의 표적이 됐고, 처음엔 한두 명이 시작했지만 나중엔 주변이 따라 웃으면서 점점 더 많은 아이들이 끼어들었다고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얼마 뒤, 영화 《군체》를 봤습니다. 화면 속 장면들이 그날 아이의 목소리와 계속 겹쳐 보였습니다.
군체에서 집단지성이 공포가 되는 순간
영화 《군체》는 좀비가 집단지성(Collective Intelligence)을 갖게 된다는 설정에서 출발합니다. 여기서 집단지성이란 개별 개체가 각자의 정보를 실시간으로 공유하고, 한 개체의 학습이 곧 집단 전체의 진화로 이어지는 현상을 말합니다. 처음엔 짐승처럼 기어 다니던 감염자들이 두 발로 걷기 시작하고, 이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거나 인간의 행동을 모방하는 단계까지 발전합니다.
제가 이 장면을 보면서 등골이 서늘해진 건 단순히 좀비가 무섭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학습 속도 자체가 두려웠습니다. 한 개체가 배운 것이 지체 없이 전체로 전파되는 구조, 그건 오히려 챗GPT 같은 대형언어모델(LLM)에 더 가까운 개념이더라고요. 실제로 연상호 감독도 "감염자들이 업데이트된다는 개념"을 영화 핵심으로 언급했는데, 저는 이 지점이 기존 좀비물과 가장 크게 구별되는 부분이라고 봤습니다.
학계에서도 집단지성에 대한 연구는 꾸준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의 연구에 따르면 집단이 개인보다 정확한 판단을 내리는 조건은 "구성원이 독립적으로 사고할 때"로 한정됩니다(출처: Harvard Business Review). 역설적이게도, 모두가 동일한 정보를 공유하고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군체는 집단지성이 아니라 집단오류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영화가 그리는 좀비 군체가 무서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 집단지성: 개체의 학습이 실시간으로 전체 집단에 전파되는 현상
- 대형언어모델(LLM): 방대한 데이터를 학습해 인간의 언어를 처리하는 AI 모델
- 군체 설정의 차별점: 좀비가 단순 본능이 아닌 정보 기반으로 진화한다는 점
군체현상, 영화 밖에서도 작동하고 있었다
영화에서 클라이맥스를 이루는 장면은 앤트밀(Ant Mill) 현상입니다. 앤트밀이란 군대개미 집단에서 선발대가 급격히 방향을 바꿀 때 후발대가 앞 개체를 먹이로 착각해 무한 원형 행진을 하다 아사하는 현상입니다. 쉽게 말해 프로그램처럼 움직이는 개체들이 오류 신호를 받았을 때 외부 개입 없이는 스스로 멈추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영화 속에서는 주인공이 입고 있던 옷이 좀비 무리 중 하나에게 씌워지면서 정보 충돌이 발생하고, 결국 전체 군체가 오류 상태로 진입해 멈추게 됩니다. 이 장면에서 저는 컴퓨터의 블루스크린 재부팅 이미지를 떠올렸습니다. 오류로 인해 쌓아 온 데이터를 초기화하는 것, 그 구조가 꽤 정교하게 구현됐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이 장면이 영화보다 현실에서 더 자주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터넷에서 누군가를 비난하는 흐름이 만들어지면, 저 역시 정확한 내용을 확인하기 전에 그 분위기에 끌려간 적이 있었습니다. 아이에게 "남들이 한다고 따라 하지 마"라고 말하면서, 정작 저는 얼마나 다를까요. 군체현상은 좀비만의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사회심리학에서는 이를 동조 현상(Conformity Effect)이라 부릅니다. 여기서 동조 현상이란 개인이 집단의 의견이나 행동에 자신의 판단을 맞추는 경향을 말합니다. 솔로몬 애쉬(Solomon Asch)의 고전 실험에서는 명백히 틀린 답을 다수가 선택했을 때 피험자의 75%가 최소 한 번은 집단의 오답을 따랐습니다(출처: Simply Psychology — Asch Conformity Experiments). 제가 이 수치를 보고 불편했던 건, 숫자가 낯설지 않아서였습니다.
엄마의 시선으로 본 결말 해석
영화의 악역 서영철은 "서로 속이고 배신하는 인간보다, 완벽하게 소통하는 군체가 더 합리적"이라는 믿음으로 바이러스를 퍼뜨립니다. 이 대사가 저는 생각보다 오래 머릿속에 남았습니다. 틀린 말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인간의 소통은 비효율적이고 감정적이며 자주 왜곡됩니다.
그런데 결말에서 그 완벽한 군체는 앤트밀 오류 하나로 전체가 멈춥니다. 제가 이 결말을 해석한 방식은 이렇습니다. 개인의 판단이 사라진 집단은 오류에 극도로 취약하다는 것입니다. 다양성과 비효율이 오히려 시스템의 복원력(Resilience)이 됩니다. 여기서 복원력이란 외부 충격이나 오류가 발생했을 때 시스템이 스스로 회복하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완벽한 균일성은 외부 개입 없이는 스스로를 고칠 수 없습니다.
아이가 숙제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이 생각이 이어졌습니다. 제가 아이에게 가르치고 싶은 건 결국 하나입니다. 친구들과 잘 어울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일 때 "이게 맞는 걸까?" 한 번쯤 멈출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 그 한 박자의 정지가, 군체가 가질 수 없는 능력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한 좀비가 의식이 있는 듯 눈동자를 천천히 움직입니다. 저는 이 장면을 단순한 속편 암시가 아니라, "개체성의 회복 가능성"으로 읽었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열린 결말은 감독이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을 담는 자리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군체 속에서도 자기 눈으로 세상을 보려는 존재, 그게 영화가 끝까지 남겨 놓은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군체 결말에서 좀비들이 갑자기 멈추는 이유가 뭔가요?
A. 주인공이 입고 있던 옷이 좀비 무리 중 하나에게 씌워지면서 "저 옷을 공격하라"는 서영철의 명령 정보가 충돌했습니다. 개미류처럼 프로그램 방식으로 작동하는 군체는 이런 오류가 발생하면 외부 개입 없이는 스스로 수정하지 못합니다. 오류로 인해 쌓아온 데이터 전체가 초기화된 것으로, 컴퓨터의 블루스크린 후 재부팅과 같은 원리입니다.
Q. 군체와 부산행 중 어느 쪽이 더 재미있나요?
A. 장르적 재미의 결을 다르게 보는 편이 맞습니다. 부산행은 인물 간 감정선과 도덕적 갈등이 중심이고, 군체는 설정의 신선함과 속도감이 장점입니다. 개연성이나 캐릭터 서사를 꼼꼼히 따지는 편이라면 군체보다 부산행 쪽이 더 만족스러울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대로 설정의 참신함과 긴장감을 우선한다면 군체도 충분히 가치 있습니다.
Q. 군체 마지막 장면에서 눈동자 움직이는 좀비는 무슨 의미인가요?
A.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는 열린 결말입니다. 초기화 이후에도 일부 개체에서 의식이 남아 있을 수 있다는 암시로 읽힙니다. 속편 가능성을 열어두는 장치이기도 하지만, 영화의 맥락에서 보면 완전한 균일화에도 저항하는 개체성의 존재를 보여주는 장면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Q. 군체 좀비들이 인간을 모방하는 장면, 실제로 어떻게 연출했나요?
A. 좀비 연기자들은 현대무용, 발레, 스턴트 전문가 세 그룹으로 구성됐습니다. 연상호 감독이 직접 "한국 내로라하는 현대 무용수들의 힘이 필요하다"고 밝혔을 정도로 퍼포먼스에 공을 들였습니다. 특히 엘리베이터 장면처럼 인간 행동을 따라 하는 모방 연기는 일부 배우들의 연기보다 오히려 더 인상적이었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결론
《군체》는 개연성이나 캐릭터 서사 면에서 아쉬운 부분이 분명히 있습니다. 조연들이 역할을 완수하고 빠르게 소비되는 방식이나, 후반부로 갈수록 집단지성 설정이 서영철의 군주 서사에 묻히는 점은 저도 아쉽게 봤습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제게 오래 남은 건, 스크린 밖에서도 군체현상이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주 선명하게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같은 방향을 보고 있을 때 혼자 멈춰 서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리고 그 멈춤이 얼마나 중요한지를요. 좀비 장르에 익숙하거나 집단심리에 관심 있는 분이라면 한 번쯤 볼 만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